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대마도]] === 고려 말 왜구 문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려와 [[쓰시마]](대마도) 사이에 왜구 문제에 대해 협상을 하는 사자(사신)가 왕래하는 기간 중에는 왜구가 일절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공민왕]] 16년(1367년) 3월에 강화부를 침구한 이래 공민왕 18년(1369년) 11월에 다시 아주(충남 아산)에 침구할 때까지 약 2년 9개월 동안 단 1건의 왜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왜구가 일절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경인년 이후 거의 매년 왜구가 침구해 오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즉, 이는 당시 왜구의 배후 조종인물이 대마도의 영주인 쇼니 요리히사 또는 소 쓰네시게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왜구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 304~305쪽] 대마도의 영주인 요리히사나 쓰네시게가 왜구의 준동을 지원하거나 지시했다는 추측도 있는 반면에 대규모로 일어난 왜구에 대해 두번의 여몽 일본 정벌 시도로 인해 쓰시마와 이키 섬부터 초토화 되는 피해를 입어 이 일대를 무사도를 강조하고 전통에 대해 집착하는 사무라이 가문들이 지배력을 잃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막부가 쓰시마 섬을 지배하기 이전에도 이 일대의 섬들은 왜구의 활동이 잦고 도적떼들이 자리잡아 한반도와 일본 본토 가리지 않고 털어대는 도적 소굴을 이뤄 골칫거리였는데 이 시기 쓰시마를 관리하는 사무라이 가문들이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왜구의 활동에 대해 방치하고 생계를 유지하려 백성들도 밀접하게 가담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 의견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경제 체계가 해체된 상태로 방치된 [[소말리아]]의 환경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근간을 이룬다. 몽골군의 약탈행위가 워낙 잔학했기 때문에 기록을 보면 꽤 시간이 지나서도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더군다나 재차 침입했을때에 간신히 생존한 사무라이 가의 자식대까지 몰살시켜 지배권이 유명무실 했을 것이란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 종합적으로 이 시기 왜구의 준동에 배후 세력이 쓰시마의 영주이건 아니건간에 이들의 활동을 일본 본토의 군사력을 통제하던 막부가 제어할 의지가 없거나 힘이 없었다는 것은 동일해 왜구가 활동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는건 일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